최만희 엮음, <무문관에서 꽃이 되다 - 탄하 삼성선사 자서전>, 운주사, 2007
그냥 읽고 지나가려다, 마음이 아려서 리뷰를 쓴다.
수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뚝심 없고,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수도자가 되고, 그 길을 계속 간다는 것만으로도 그 성격의 유별남은 보장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도 유독 더 단단한 성벽을 가지면, 수행자도 유명해지고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성공적인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탄하 스님은 표지에 실린 사진으로 보아도 책 내용으로 보아도 그 성격이, 뭐랄까, 대단하다! 그가 득도한 것이 맞는가. 활연대오하였는가. 나는 모르겠다. 다만 불교계에서 득도했다고 딱히 인정받지는 못한 듯하다.
그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세상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아웃사이더로 보인다. 스님의 세계에도 가문이 있고, 가문이 있으니 명문가가 있다. 듣기로는 해인사가 제일 명문가라던가. 속가의 재력, 집안, 본인의 학벌 등도 물론 중요시 될 것이다. 탄하 스님은 가난하디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이름난 절인 법주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나 그의 은사 스님이 대처승인 까닭에 스님 세계에서의 가문도 멸문 수준. 스님의 학벌은, 학벌이랄 것도 없는 정도.
그래서 그는 강원에서, 승가대학에서 공부는 했으나, 실제 수행에서는 스승 없이, 홀로 공부했다. 혼자 만행을 하고, 혼자 암자에서 공부하고, 법주에서도 방문을 닫고 혼자, 무문관에서는 더더욱 혼자. 그가 공부한 것을 글로, 행동으로 세상에 보여주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른 스님들과 법거량을 하고자 했으나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독하게 식탐을 닦고, 물욕을 닦고, 색욕을 닦고. 그걸 닦겠다고 몸을 상하고, 그래도 끝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다 열반에 들었다.
그가 더 많이 교육을 받았다면, 그가 세상과 더 많이 어울렸다면, 그는 더 멋있는 글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조촐하다. 강원과 승가대학에서 배운 언어들, 그리고 소박하디 소박한 문장들이 그가 가진 전부이다. 그리고 오로지 밀어붙이기. 끊임없이 계속하기. 절망하지 않고,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하기. 죽을 때까지 쉬지 않기.
그는 의자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아사. 화장 후 사리를 고르지도 않았다. 그의 화장하고 난 뼈를 분쇄할 때 유독 소리가 요란했다는 화장터 분쇄기 기사의 말로 장엄한 사리 사진을 대신한다. 세상이란, 성공이란, 명성이란. 이 세상에서의 그런 명예들이 부질없다면, 우리의 노력은 어떤 것인가. 노력은 부질있는 것인가.